2화 — 아무도 안 줍는 것들
"이 정도. 아까도 이만큼 떨어져 있었어."
티아나가 팔을 벌려 보였다.
나는 수첩에 대략의 거리를 적었다. 가까워졌다거나 멀어졌다는 증거는 없었다.
"적으면 뭐가 달라져?"
"다음에 달라졌을 때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렇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학생과 문을 열었다가 다시 돌아봤다.
"아까는 미안. 대뜸 무섭다고 해서."
"정령들이 무서워하는 거잖습니까."
"말은 내가 했잖아."
나는 펜을 멈췄다.
티아나는 이번에는 정말로 안에 들어갔다.
원작 3부 보스 「녹빛 붕괴」.
정령왕과의 계약이 뒤틀린 뒤에도 저 아이는 웃었다. 인간의 자아가 정령계에 먹히고, 대륙 서부가 숲에 잠기는 동안에도.
화면으로 볼 때는 그 웃음이 제일 끔찍했다.
지금은 방금 한 말이 남았다.
말은 내가 했잖아.
나는 수첩 귀퉁이에 ‘정령왕 계약’을 적었다.
지금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중에 알아서 떠오르겠지 하고 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기숙사 배정표 맨 아래에 내 이름이 있었다.
서관 3층 306호 — 카시안 로웰. 단독 배정.
원소학부 3반에서 나와 방을 쓰겠다는 학생이 없었다. F등급과 동실이면 실기 조편성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받아온 규정집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없는 규정이 있는 규정보다 잘 지켜졌다.
방에는 침대와 책상, 삐걱대는 의자가 하나씩 있었다. 창밖으로 소각장 굴뚝이 보였다.
나는 창문을 닫고 계획을 적었다.
D-44.
1. 촉매액 열두 병 확보 — 근로 배정 완료
2. 도서관 3층 열람 방법 확인
3. 규정집 부록 정독
4. 폐관탑 진입로 확인
5. 실기 참관 — 성공과 실패 모두 기록
게임이었다면 창고로 달려가 아이템을 눌렀을 것이다.
여기서는 내일부터 하루 세 시간씩 상자를 옮겨야 했다. 끝내고도 공부할 힘이 남을지는 몰랐다.
나는 오늘 읽을 수 있는 책부터 펼쳤다.
부록 열두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실기 미이수자의 도서관 열람에 관한 예외였다. 담당 교수 승인을 받으면 학년 제한을 적용하지 않았다.
공백이라서 책도 못 읽는 건 아니었다.
종이를 끼워두고 다음 장을 넘겼다.
첫 출근일은 D-43.
유실물 보관소 문을 열자 먼지가 쏟아졌다.
상자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부러진 지팡이, 짝 없는 부츠, 주인 이름이 지워진 로브.
안쪽에서 사과 껍질 벗기는 소리가 났다.
"근로 장학생?"
"카시안 로웰입니다."
"하겐이다. 승인서 줘봐."
백발의 노인이 도장을 확인하고 내 이름 옆에 표시했다.
"날짜별로 정리하고 장부에 적어. 값나가는 건 나한테 가져오고."
"날짜가 없는 건요?"
"따로 빼."
"장부에 없는 건요?"
"그것도."
나는 통로를 돌아봤다.
"여기 있는 거 거의 전부일 것 같은데요."
노인이 사과를 베어 물었다.
"일찍도 알아챘네."
첫 상자에는 오래된 장부가 들어 있었다. 정작 상자 자체의 기록은 없었다.
위치는 알아.
문제는 그 위치가 ‘보관소 구석’이라는 것이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교수에게 돌아간 완제품만 봤다. 창고를 뒤지는 과정은 대사 한 줄로 끝났다.
나는 소매를 걷었다.
공략에 없는 세 시간을 시작했다.
둘째 날에는 사다리를 타고 상자를 내렸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손짓으로 끝났을 일에 손바닥이 까졌다.
해가 기울 무렵에는 병 모양만 봐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잉크병 세 개와 식초 한 병이 전부였다.
하겐이 퇴근하라고 했을 때, 나는 빈 궤짝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도 있어."
"예."
"상자 말이다."
나는 웃다가 손바닥을 폈다. 상처에 먼지가 붙어 있었다.
오늘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뒤진 상자에는 분필로 표시했다.
내일 같은 곳을 뒤지지 않도록.
셋째 날, 표시하지 않은 마지막 줄에서 궤짝을 찾았다.
황동 마개. 병목 아래 두 줄의 홈.
열두 병.
하나를 기울였다. 무색투명한 액체가 유리에 달라붙었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아이템을 확대해 돌려 봤을 때와 같았다.
로자린드 교수의 서브 퀘스트.
실패작 열두 병을 버리라고 했더니, 창고에 처박아 뒀더군.
시판 물약보다 마력 회복 효율이 여섯 배 높은 성위 촉매액이었다.
나는 개수를 다시 셌다.
"찾던 거냐?"
하겐이 뒤에서 물었다.
너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같은 물건이 한 상자에 든 건 처음 봐서요."
노인이 궤짝 옆면의 희미한 이관표를 문질렀다.
"연구동 폐기품이군. 여기 보내면 누가 대신 버려주는 줄 알아."
"가져가도 됩니까?"
"어디 쓰게?"
"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하겐은 병을 한번 들어보고 내려놓았다.
"세상엔 두 종류의 물건이 있어. 누가 찾는 거, 아무도 안 찾는 거. 이건 이십 년째 후자야."
그가 장부를 내 쪽으로 밀었다.
"열두 병. 인수했다고 적어. 빈 상자만 보고 또 찾지 않게."
나는 이름과 수량을 적었다.
병을 천으로 감싸 가방에 넣었다. 마지막 병에는 남겨둔 붕대를 둘렀다. 내 손바닥에 쓸 건 나중에 구하면 됐다.
어깨끈이 깊이 파고들었다.
D-41.
아직 회복할 마력이 없었다.
그래도 세 시간을 세 번 써서, 계획표의 첫 줄을 지울 물건을 얻었다.
기숙사 뒷마당에서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소각로 앞에 조교 하나가 서 있었다. 배치고사 때 측정석 옆에 있던 남자였다.
명찰에 바르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 맨 위에도 이름이 있었다.
카시안 로웰. 측정 원지.
"제 기록 아닙니까?"
"측정값이 없으니 보관할 것도 없지."
종이 모서리에 불이 붙었다.
"등급 기록도 지워집니까?"
"그건 남아. 걱정 마라. F등급."
내 이름을 읽을 수 있는 동안에도 그는 등급으로 불렀다.
"원지는 왜 폐기합니까?"
"공백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규정이야."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내가 받은 규정집에서는 못 본 조항이었다. 조교용 규정이 따로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록을 태우는 사람에게만 물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바르텐의 시선이 내 가방에 멎었다.
나는 병이 부딪치지 않도록 아래를 받쳤다.
"괜히 이것저것 뒤지고 다니지 마라, 학생."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불 속에서 말렸다.
"여기선 없는 사람이 제일 오래 사니까."
— 2화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