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아직 안 채운 것
다음 날, 나는 도서관 3층 앞에 섰다.
열람 제한 구역 — 2학년 이상.
계단 입구에 놋쇠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안쪽으로 서가 그림자가 보였다. 저 위엔 원소마법 상급 이론서, 회로 구조학, 술식 해석 원전이 있다.
1학년은 못 들어간다.
하지만 규정집 부록 12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실기 이수 학생은 2학년부터 열람 가능. 단, 실기 미이수자는 담당 교수 승인 시 학년과 무관하게 열람할 수 있다.
실기 미이수자.
그러니까—나 같은 F등급.
이 조항은 300년 전 바네사가 직접 넣은 것이다. 게임에서도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사문(死文)이었다. 애초에 F등급으로 입학하는 플레이어가 없으니 아무도 쓸 일이 없었다.
나는 신청서를 들고 신비학부 연구동으로 걸어갔다.
로자린드 교수의 연구실은 책 냄새와 마른 잉크 냄새로 가득했다.
그녀는 서류를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봤다. 그러곤 물었다.
"자네, 이 조항을 어디서 봤지?"
"규정집 부록 12페이지입니다."
"…규정집 부록을 읽는 신입생은 30년 만에 처음이야."
"할 게 없어서요. 실기를 못 들어가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도장을 꺼내면서도 손을 바로 내려놓지 않았다.
"공백이라고 들었네만."
"예."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나는 공백을 세 번 봤어."
잉크가 도장에 눌리는 소리가 났다.
"셋 다 아카데미를 떠났지. 한 명은 1년, 한 명은 반년. 마지막 한 명은 두 달을 못 버텼네."
"…"
"자네가 넷째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교수로서의 소감이야."
"넷째는 아닐 겁니다."
"근거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 셋 중 누구도, 도서관 3층 신청은 안 했잖습니까."
도장이 종이에 찍혔다.
로자린드 교수는 서류를 밀어주면서, 처음으로 안경을 벗고 나를 봤다.
그 눈이 내 얼굴이 아니라 가슴께—심장 아래쯤을 보고 있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았다.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아니." 그녀는 안경을 다시 썼다. "공백은 보통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 텅 빈 컵을 보는 것처럼."
"제 건 다릅니까?"
"자네 건."
그녀가 잠깐 단어를 골랐다.
"아직 안 채운 것 같아."
연구실을 나오는데 등에 소름이 돋았다.
복도 창문으로 저녁 해가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승인 도장이 찍힌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세 번째 줄에 동그라미를 쳤다.
D-40.
오후에는 실기 수업 참관이 있었다.
원소학부 3반. 연무장 가장자리, 참관석이라고 이름 붙은 나무 벤치 하나. 거기 앉은 건 나뿐이었다.
"오늘은 1서클 점화 술식이다. 회로에 마력을 올리고, 손끝에서 형태를 잡아."
학생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손끝에서 불씨가 하나씩 피었다 꺼졌다. 성공률은 절반쯤. 실패한 애들이 웃으며 서로를 놀렸다.
나는 벤치에 앉아 그걸 봤다.
그냥 본 게 아니었다.
세 번째 손가락. 마력이 손목에서 두 번 꺾인다. 저 애는 회로 각도가 나빠서 소모가 1.4배쯤.
저쪽은 반대로 너무 빨라. 형태를 잡기 전에 밀어내니까 불씨가 흩어지지.
관측.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력이 없으니 따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봤다. 각도, 속도, 호흡, 실패의 이유까지 전부.
하루 스무 명. 40일이면 800번.
쓸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자료일 테니까.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연무장 반대편이 조용해졌다.
루시아 폰 벨트하임이 나와 있었다.
수석이라 시범을 맡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지도 않았다. 그냥 시선을 앞에 두었을 뿐인데, 허공에 불꽃 여덟 개가 동시에 떠올라 정육면체 배열을 이뤘다.
영창도 없었고 마법진도 없었다.
"…미친."
누군가 중얼거렸다. 나도 속으로 같은 말을 했다.
다만 이유가 달랐다.
소모가 거의 없어. 회로를 쓰는 게 아니라, 회로 바깥에서 뭔가를 끌어오고 있어.
성위마법. 별의 힘을 빌리는 방식.
원작 컷신에서 저 배열은 여덟 개가 아니라 여덟 백 개로 늘어난다. 그리고 아카데미가 지워진다.
불꽃이 흩어지고,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루시아는 인사도 없이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그녀가 한 번 이쪽을 봤다.
참관석에 혼자 앉아 있는 F등급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 다가가면 그냥 이상한 놈이지.
나는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루시아 — 회로 부하 없음. 소모 경로 미확인. 계속 관측할 것.
그날 밤, 나는 규정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부록만 마흔여덟 페이지짜리 두꺼운 책이었다. 게임에서는 존재조차 하지 않던 물건이다. 아이템 설명 한 줄로 퉁쳐졌던 것들이 여기선 전부 조문(條文)으로 살아 있었다.
새벽 두 시쯤, 나는 부록 41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제7절 — 봉인 구역
폐관탑은 학생의 출입을 금한다.
위반 시 즉시 퇴학한다.
단, 결계는 마력 반응에 의해 작동하며, 반응이 감지되지 않을 경우—
문장이 거기서 끊겨 있었다.
다음 줄이 있어야 할 자리는 잉크로 두껍게 덧칠되어 있었다. 300년쯤 묵은 검은 얼룩이.
나는 종이를 등불에 비춰봤다.
덧칠 아래로, 아주 흐릿하게 글자 윤곽이 비쳤다.
—작동하지 않는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게임에선 이런 거 안 알려줬는데.
커뮤니티에서 내가 발굴했다고 자랑했던 그 배수로 루트는, 사실 정문으로 들어가도 되는 곳이었던 거다. 마력이 없기만 하면.
이 학교에서 그 조건을 만족하는 인간은 단 한 명이다.
나는 창밖을 봤다. 첨탑 일곱 개 너머로, 담쟁이에 삼켜진 검은 탑 하나가 서 있었다.
폐관탑.
원작에서 3학년이 되어서야, 성위 3성 이상을 데려와야 열리는 곳.
내일 밤.
펜을 들어 네 번째 줄에 동그라미를 치려다가—
똑.
창문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었다. 유리 너머, 아무도 없었다. 3층이다. 나뭇가지도 닿지 않는다.
그런데 창유리 바깥면에 물방울 같은 것이 하나 맺혀 있었다. 그게 아주 천천히 옆으로 굴러가더니—멈춰서, 나를 보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바람이 없는데 유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령인가.
낮에 티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서워하는데, 안 도망가.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창유리에 댔다.
물방울이 파르르 떨리더니, 다음 순간 유리 표면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지기 직전.
유리에 서린 김 위로, 짧은 글자 자국이 남았다. 손가락으로 쓴 것 같은, 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빼뚤한 글씨.
빈 잔
나는 그 글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김이 마르면서 글자가 흐려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