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백지
밤 열한 시 반, 폐관탑 앞에 섰다.
램프를 내려놓고 손바닥을 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측정석 앞에서는 그게 싫어서 손을 떼지 못했다. 지금은 혹시 뭐라도 생겼을까 봐 두 번 확인했다.
D-40.
날짜가 바뀌기까지 삼십 분이 남았다.
표석 뒤로 담쟁이에 덮인 정문이 보였다.
폐관탑 — 학생 출입 금지.
위반 시 즉시 퇴학.
규정집에 따르면 결계는 침입자의 마력 반응을 읽었다. 없으면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쪽의 문까지 열리는 건 아니었다. 경보가 울리지 않아도 사람이 나를 보면 끝이었다.
나는 본관 창문을 살폈다. 불이 켜진 방 두 곳. 정문에서는 모두 나뭇가지에 가렸다.
램프 덮개를 좁히고 표석을 넘었다.
한 걸음.
발뒤꿈치를 들지 못한 채 기다렸다.
다음 날 퇴학당하는 게임 속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저장한 곳으로 돌아가면 됐다.
풀벌레가 울었다.
두 걸음. 세 걸음.
경보는 없었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야 이를 악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턱이 아팠다.
정문까지는 맞아.
나는 손잡이를 밀었다.
경첩이 길게 울었다.
몸이 저절로 굳었다. 결계보다 녹슨 쇳조각이 나를 더 확실하게 알아봤다.
한참 뒤 문틈으로 몸을 넣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기억보다 좁았다.
게임에서는 보이지 않던 돌부리에 구두가 걸렸다. 벽을 짚어 버티다 까진 손바닥이 쓸렸다.
반대 손으로 램프를 옮겼다.
첫 갈림길에서는 왼쪽. 무너진 서가를 지나 세 계단 아래.
위치는 맞았다. 화면의 지도가 실제 계단으로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숨이 돌아왔다.
지하 3층 문 앞에서 뒤를 돌아봤다. 내 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되짚어 나갈 길을 확인하고 램프를 들었다.
문에는 일곱 개의 별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중심은 비어 있었다.
원작에서 이 문을 여는 조건은 성위 3성 이상의 마력 각인. 문장에 마력을 부을 수 없는 나는 정식 조건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했다.
나는 그 아래 글자를 비췄다.
일곱 별이 그를 시험하고, 중심의 공백이 그를 부른다.
삼 년 동안 여러 번 읽었다.
유산에 붙은 장식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문을 여는 방법은 공략에 따로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중앙의 빈 곳을 봤다.
‘공백’을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읽을 때와, 내 판정명으로 읽을 때 문장이 달라졌다.
정령들이 남긴 글자. 로자린드가 고르던 말.
어느 것도 이 문이 열린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나는 램프를 바닥에 놓았다.
손바닥을 문장 옆 돌에 먼저 댔다. 차가웠다.
아무 일도 없었다.
조금씩 옮겨 중앙에 닿았다.
이번에는 돌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별 하나가 켜졌다.
손을 빼려 했을 때 두 번째가 켜졌다.
"잠깐……"
일곱 개가 전부 빛났다.
램프 불꽃이 눌리듯 꺼졌다. 별빛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왔다.
심장 아래가 움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부딪쳤다. 소리를 내려고 입을 벌렸지만 숨이 먼저 끊겼다.
빛이 가슴 안쪽을 훑었다. 길이 없는 곳으로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손을 떼려고 힘을 줄수록 어깨만 당겨졌다.
문 위로 글자가 드러났다.
제1의 유산 — 백지(白紙).
관측하라. 기록하라.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마지막 획이 켜졌을 때 손이 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졌다.
한 번 들이쉰 숨을 끝까지 내보내는 데 오래 걸렸다. 입 안에 피 맛이 났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램프를 더듬어 찾고 부싯돌을 몇 번이나 헛쳤다.
불이 붙자 손바닥이 보였다.
옅은 별 문양이 남아 있었다.
문질렀다. 까진 곳만 쓰렸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서클은 없었다. 마력이 차오르는 느낌도 없었다.
대신 심장 아래에 낯선 감각이 있었다. 눈을 감으면 비어 있는 면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위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백지.
고개를 들었다.
닫혀 있던 문이 안으로 벌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성위마법 서론 — 바네사 저』.
게임에서는 성위 2성에 도달해야 글자가 보이는 책이었다. 나는 한참 표지만 내려다봤다.
제목을 읽고 있었다.
그것부터 이상했다.
첫 장을 폈다.
줄마다 문자가 있었다. 눈을 옮기는 순간 심장 아래에도 같은 줄이 생겼다.
나는 책을 덮었다.
첫 줄을 떠올렸다. 글자뿐 아니라 획의 기울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시 폈다.
틀린 곳이 없었다.
다음 장의 도형으로 시험했다. 책을 덮은 뒤 종이에 옮겼다. 손이 떨려 선은 삐뚤었지만, 빠뜨린 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세 번째 장을 넘기다 멈췄다.
웃음이 났다.
입술이 아파 입을 다물었는데도 계속 새어 나왔다.
읽을 수 없던 책이 읽혔다.
세 번을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러나 다음 문장의 뜻을 설명해보려 하자 막혔다. 도형도 그대로 떠오를 뿐, 왜 그 자리에 선이 놓이는지는 몰랐다.
이건 이해가 아니었다.
복제.
나는 낮의 연무장을 떠올렸다. 손을 펴던 학생. 두 번 흔들리고 남던 불씨.
백지에 흐릿한 선이 겹쳤다.
수첩을 꺼내 그때의 기록을 읽자 선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불꽃이 흩어지던 모양과 유지되던 모양이 나란히 남았다.
내가 보고 기억한 것을 옮겨 적고 있었다.
루시아의 여덟 불꽃도 떠올려봤다.
배열은 남았다. 그 사이를 무엇이 잇는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못 본 데까지 채워주는 건 아니구나.
나는 책상에 양손을 짚었다.
마법사에게는 마력을 흘리는 자기 회로가 있었다. 공백인 내게는 새길 모양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 비어 있는 자리가 남의 술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베낀 모양대로 흘릴 수만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손끝을 봤다. 불은 피지 않았다.
웃음을 멈췄다.
쓸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새로 생긴 길과 이미 걸어간 길을 헷갈릴 뻔했다.
서문을 지나 몇 장을 더 읽었다. 머릿속에 남은 도형을 책과 대조하다가 먼 곳에서 세 시 종을 들었다.
책은 제자리에 두었다. 읽은 부분은 남아 있었고, 낡은 책을 품에 넣은 채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계단에 앉아 아픈 무릎을 잠깐 쉬게 했다.
손바닥에 새겨진 별을 봤다.
방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점화를 시험할 것이다. 성공하면 그다음은 숲그늘 아귀의 약점. 어떻게 해야 거기까지 마법을 닿게 할 수 있을지 계산할 것이다.
도망칠 길만 적혀 있던 숲의 지도에, 처음으로 다른 표시를 할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탑 밖은 아직 어두웠다.
멀리서 세 시 종을 들은 뒤에도 한참 책을 봤다. 자정은 이미 지났다.
D-39.
나는 손바닥을 소매로 덮었다.
담장 모서리에 다가가다 멈췄다.
본관 쪽 길에 바르텐이 서 있었다.
불도 들고 있지 않았다. 얼굴은 안 보였지만 달빛에 드러난 옆모습과 조교복을 알아봤다.
나는 램프 덮개를 닫고 담 뒤로 몸을 붙였다.
그의 고개는 폐관탑 쪽을 향해 있었다.
내가 나온 문 쪽이었다.
돌을 밟지 않도록 발을 옮겼다. 바로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들었다.
"열렸군."
— 4화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