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백지
밤 열한 시.
나는 기름 램프 하나만 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D-39.
담쟁이에 삼켜진 검은 탑은 본관 뒤편,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 끝에 서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소리가 죽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정문 앞 스무 걸음 지점에 낡은 표석이 박혀 있었다.
폐관탑 — 학생 출입 금지. 위반 시 즉시 퇴학.
여기서부터가 결계다.
원작에서 이 선을 넘은 학생은 예외 없이 다음 날 짐을 쌌다. 결계가 침입자의 마력 파장을 읽어 학년주임실에 그대로 전송하기 때문이다.
결계는 마력 반응에 의해 작동하며, 반응이 감지되지 않을 경우—
작동하지 않는다.
300년 묵은 잉크로 덧칠된 그 한 줄에, 나는 목숨 대신 학적을 걸었다.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뎠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발. 세 발. 다섯 발.
공기가 미묘하게 저항하는 감각은 있었다. 물속을 걷는 것 같은. 하지만 경보도, 빛도, 소리도 없었다.
결계는 나를 감지하지 못했다.
애초에 여기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이 학교에서 마력이 없어서 이득을 보는 건 나 하나뿐이겠네.
폐관탑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밀자 경첩이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안쪽은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무너진 계단, 부러진 서가, 바닥에 흩어진 종이 조각. 벽면에는 별자리 문양이 층층이 새겨져 있었고, 램프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그것들이 아주 희미하게 반짝였다.
지하로 내려갔다.
1층. 2층.
계단이 좁아지고 천장이 낮아졌다. 3층 앞에 도착했을 땐 램프 기름이 절반쯤 줄어 있었다.
문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대신 문장(紋章) 이 있었다.
일곱 개의 별이 원형으로 배치되고, 그 중심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문양.
나는 그 앞에 섰다.
게임에서 이 문을 여는 조건은 성위마법 3성 이상의 마력 각인이었다. 3학년 후반, 루시아나 로자린드를 파티에 넣어야 열린다. 1학년이 여기 오는 건 애초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온 이유는 하나였다.
문 아래 새겨진, 유저들이 전부 플레이버 텍스트라고 넘겼던 한 줄.
「일곱 별이 그를 시험하고, 중심의 공백이 그를 부른다.」
나는 그 문장을 3년 동안 백 번쯤 읽었다.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다르게 읽혔다.
공백이 그를 부른다.
아니면—공백인 자를 부른다는 뜻이거나.
손이 떨렸다.
틀렸으면 나는 그냥 밤중에 금지구역을 서성인 F등급이다. 내일 퇴학이고, 39일 뒤의 죽음은 오지도 않는다.
맞으면.
맞으면.
나는 손을 뻗어, 문장 중심의 빈 자리에 손바닥을 댔다.
콰아앙.
일곱 개의 별이 동시에 타올랐다.
램프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별빛만이 소용돌이쳤고, 그 빛이 전부 내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왔다.
뜨겁지 않았다.
아팠다.
심장 아래, 텅 비어 있던 그 자리가 안쪽에서부터 긁히는 감각. 없는 걸 억지로 파내는 것 같은. 나는 무릎을 꿇었고,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시야 가장자리로 문장이 흘렀다.
별자리가 아니었다. 글자였다.
300년 전 문자로, 아주 짧게.
제1의 유산 — 백지(白紙).
관측하라. 기록하라.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빛이 사라졌다.
나는 바닥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에 옅은 별 문양이 남아 있었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램프를 더듬어 다시 켰다.
심장 아래를 확인했다.
서클은 없었다. 마력도 없었다. 측정석에 손을 대면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을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페이지 같은 감각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방 안쪽에는 낡은 책상 하나, 그 위에 책 한 권.
『성위마법 서론 — 바네사 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원작에서 이건 얻어도 읽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해독 조건이 성위 2성. 마력이 0인 나에겐 영원히 백지로 보여야 정상이다.
책을 폈다.
글자가—읽혔다.
읽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첫 문단을 시선으로 훑는 순간, 그 내용이 심장 아래 백지 위에 그대로 옮겨 적혔다. 이해가 아니라 복제였다. 잉크가 종이에 스미는 것처럼, 아무 저항 없이.
나는 한 장을 넘겼다. 또 넘겼다.
그리고 세 장째에서 손이 멈췄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먼지 앉은 지하실에서 혼자, 바보처럼.
아, 그렇구나.
공백은 재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형태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서클을 새긴 마법사는 그 서클의 모양대로만 마력을 흘릴 수 있다. 원소는 원소로, 암흑은 암흑으로. 평생 자기 그릇 안에 갇혀 산다.
나는 그릇이 없다.
그래서—남의 그릇을 통째로 베껴 쓸 수 있다.
책을 덮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램프를 들고 계단을 오르며, 나는 남은 날짜를 다시 셌다.
39일.
이제 목표가 바뀌었다.
살아남는 게 아니야.
47일째 그 자리에서, 나는 원작을 부순다.
탑을 나섰을 때 하늘이 희끄무레했다.
나는 손바닥의 별 문양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소매로 덮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려다—멈췄다.
본관 쪽 담벼락 그늘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램프도 없이. 이 시간에.
조교 바르텐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폐관탑을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 봐온 사람의 눈으로.
나는 숨을 죽이고 반대편 담을 따라 돌았다.
등 뒤에서,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렸군."
— 4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