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잉크가 없다
방에 돌아온 건 새벽 네 시였다.
문을 잠그고 복도의 발소리가 없는지 확인했다.
수첩에 바르텐의 말을 적었다.
‘열렸군.’
그가 나를 봤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가 폐관탑 앞에서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당분간 같은 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았다.
D-39.
손바닥의 별을 소매로 가리고, 촛대를 앞으로 당겼다.
오늘의 목표는 심지 하나였다.
점화 술식을 떠올렸다.
백지에 전날 오후의 장면들이 겹쳤다. 흩어진 불꽃, 너무 일찍 펴진 손, 끝까지 남은 불씨.
실패와 성공을 나란히 두자 차이가 선으로 남았다.
나는 마지막에 불을 유지했던 학생의 형태를 골랐다. 손끝을 심지 가까이 가져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목의 각도를 바꿨다. 눈을 감고 선을 처음부터 따라갔다.
심지는 검은 채였다.
세 번째에는 손가락만 아팠다.
나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지하실에서 웃던 내가 떠올랐다. 이렇게 금방 민망해질 줄은 몰랐다.
백지에는 술식이 있었다.
그 위로 흘릴 마력이 없었다.
설계도만 얻은 셈이었다.
집을 그릴 줄 안다고 벽돌이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촛대를 옆으로 밀고 침대 밑 가방을 꺼냈다.
병 열두 개를 수건 위에 놓았다.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나씩.
성위 촉매액.
마력 회복 효율 6배.
마력 회로가 형성되지 않은 자에게는 효과 없음.
게임의 설명을 수첩에 적었다. 그 옆에 도서관에서 베낀 문장을 펼쳤다.
회복용 약액의 마력을 받아 몸에 붙잡아두는 것도 회로의 일이었다.
나는 그걸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백지에 옮긴 술식으로, 흩어지기 전에 지나갈 길을 잡아준다면.
회복하지 않고 곧바로 흘려보내면 어떻게 되는가.
안 담기는 것과, 잠깐도 흐르지 못하는 건 같지 않을 수 있어.
나는 그 문장 끝에 물음표를 찍었다.
백지가 길을 대신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다만 지금 손에 있는 것들로 확인할 수 있는 가설이었다.
마개를 열었다.
한꺼번에 마시려다 내려놓았다. 빈 마개에 조금 따르고, 남은 액면에 실을 둘러 표시했다.
얼마를 썼는지는 기억에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촛대 아래에 받침을 놓았다.
그리고 마개에 담긴 액체를 삼켰다.
목 안이 서늘했다.
다음 순간 가슴 아래를 바늘로 훑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나는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다.
약액에서 풀려난 마력이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 팔 안쪽으로 통증이 튀었다가 가슴으로 되돌아왔다.
담아두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백지의 선을 떠올렸다.
심장 아래에서 손목까지. 거기서 한번 꺾고, 손끝에 형태를 남긴다.
밀어 넣는 동안 선 바깥으로 새는 감각이 있었다. 살 안쪽을 긁는 것 같았다.
손끝까지.
손을 폈다.
팟.
불씨가 생겼다.
엄지손톱보다 작았다. 손이 떨릴 때마다 흔들렸다.
나는 촛대를 잊고 그걸 봤다.
따뜻했다.
측정석은 끝까지 차가웠는데.
숨을 들이쉬자 웃음이 같이 나왔다. 정말 바보 같은 소리였다.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 불씨가 심지에 닿았다.
촛불이 켜졌다.
그 순간 코에서 피가 떨어졌다.
손끝의 불은 꺼졌다. 의자가 밀리고 나는 책상에 팔꿈치를 찧었다.
무릎을 꿇은 채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손가락을 굽히라는 생각과 실제로 굽혀지는 사이에 틈이 생겼다. 팔 안쪽은 뜨거웠다.
나는 수건을 코에 댔다.
촛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내게서 떨어져 나온 불은, 내가 쓰러진 뒤에도 남았다.
피가 멎을 때까지 재시도하지 않았다.
병을 들어 실로 표시한 곳을 봤다. 줄어든 양은 대략 이십 분의 일.
수첩에 적었다.
점화 1회 성공. 약 1/20병 소모.
지속 약 3초. 코피, 손끝 감각 저하, 팔 안쪽 통증.
‘성공’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 아래는 더 오래 걸렸다.
이 상태에서 두 번 더 썼다면 의식을 잃었을 것 같았다. 확인하겠다고 세 번을 채울 생각은 없었다.
회복 시간도 아직 몰랐다. 적어도 반나절은 몸을 살핀 뒤 다음 시도를 판단하기로 했다.
연속 시전 금지. 회복 여부부터 확인.
마개를 닫으려는데 손가락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왼손으로 돌렸다.
계산보다 이쪽이 확실한 결과였다.
열두 병이면 같은 양으로 약 240회. 방금 한 번을 썼으니 남은 건 대략 239회분이었다.
나는 ‘점화 기준’이라고 덧붙였다.
강한 마법도 그만큼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불씨 하나를 통과시킨 대가부터 이랬다.
더 나쁜 건 심장 아래였다.
약액의 기척이 사라지자 그곳은 다시 비었다. 시전한 순서와 실패한 모양은 백지에 남았지만, 마력은 남지 않았다.
한 번의 점화가 회로를 새겨주지도 않았다.
나는 계획표에 적었다.
점화 반복으로 마력량 늘리기관측할 술식과 견딜 수 있는 사용량을 따로 찾는다.
기록은 늘릴 수 있었다. 이미 백지에 남은 것도 어제보다 많았다.
그러나 시전으로 마력을 축적하거나 회로를 단련하는 보통의 훈련은 내게 성립하지 않았다. 잠깐 통과시킨 길이 사라진 자리에 통증만 남았다.
239번의 촛불을 켜고도 측정석 앞에서는 F등급.
그 끝에 회색숲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목을 문질렀다. 처음 이 몸으로 깨어났을 때부터 자꾸 손이 가던 자리였다.
그때 손끝에서 피 냄새가 났다.
나는 손을 내렸다.
숲그늘 아귀와 오래 싸울 몸은 만들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 찾은 방법으로는.
그럼 오래 싸우지 않을 방법이 필요했다.
균열의 위치. 마수가 처음 몸을 내미는 방향. 노출되는 약점.
나는 그 장면을 알고 있었다.
한 번 제대로 끼어들 수 있다면.
공격을 끊는 데는 한 번이면 된다. 그 틈에 빠져나올 수 있다면.
어떤 술식으로 그 틈을 만들지, 잘못됐을 때 어디로 달아날지부터 정해야 했다.
그래도 239번 불씨를 켜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새 종이에 숲의 지형부터 그렸다.
그리고 옆에 질문 하나를 썼다.
그 한 번에, 무엇을 베껴 쓸 것인가.
수첩을 넘겼다.
루시아의 불꽃 여덟 개.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던 배열.
마력 공급 경로는 보이지 않음.
로자린드 교수에게는 문헌을 물을 수 있었다. 실제 시전을 가까이서 볼 기회는 매일 연무장에 나오는 루시아 쪽이 많았다.
필요한 건 성위마법의 이름이 아니었다.
별의 힘을 어떻게 받아오는지, 그 과정을 봐야 했다. 그 방법도 내 몸을 망가뜨린다면 다른 수를 찾아야 했다.
나는 루시아의 이름 옆에 ‘접근’이라고 썼다.
쓰고 나니 펜이 멈췄다.
내가 아는 대화 공략은 플레이어의 선택지뿐이었다.
나는 참관석에 앉은 F등급이었다.
마법 보여달라는 말부터 꺼내면, 도와달라는 사람보다 쓰겠다는 사람에 가까워 보일 터였다.
우선 이름을 말해야 했다.
그다음은 상대 대답을 듣고 생각할 일이었다.
똑똑똑.
나는 펜을 떨어뜨렸다.
창밖에서 여섯 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병들을 가방에 넣어 침대 밑으로 밀었다. 책상 위 수첩을 닫았다.
"누구십니까?"
"나, 티아나!"
문을 조금 열었다.
티아나가 인사하려다 내 얼굴에서 시선을 멈췄다.
"너 코피 났어?"
나는 소매로 코 밑을 훔쳤다.
"볼일이 뭡니까?"
그녀는 평소처럼 바로 웃지 않았다. 내 어깨 너머를 한번 보고, 복도 쪽 허공을 돌아봤다.
"확인할 게 있어서."
문고리를 쥔 손에 감각이 덜 돌아와 있었다.
"새벽에 얘네가 폐관탑에서 너를 봤대."
— 5화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