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잉크가 없다
방으로 돌아온 건 새벽 네 시였다.
나는 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았다.
손바닥을 폈다.
해보자.
머릿속에 어제 낮 연무장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1서클 점화 술식. 스무 명이 스무 번씩 시전한 걸 한 시간 동안 지켜봤다.
회로에 마력을 올리고, 손목에서 각도를 꺾고, 손끝에서 형태를 잡는다.
세 번째 마디에서 0.3초. 밀어내지 말고 얹어야 해.
심장 아래 백지가 반응했다.
옮겨 적힌 술식이 페이지 위로 떠올랐다. 명확했다. 내가 본 것보다 더 명확했다—관측한 스무 명의 실패까지 전부 참고자료로 붙어 있었으니까.
형태는 완벽했다.
손끝을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번 더. 세 번, 다섯 번.
여섯 번째쯤에서 나는 손을 내리고 천장을 봤다.
"…아."
너무 당연한 걸 잊고 있었다.
술식은 설계도다.
설계도를 아무리 정확하게 그려도, 자재가 없으면 집은 안 지어진다.
백지는 마법을 기록한다.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잉크가 없어.
내 몸에는 마력이 단 한 방울도 없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는 침대 밑 가방을 꺼냈다.
유리병 열두 개가 서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라벨 자국만 남은 병. 20년째 아무도 안 찾아간 쓰레기.
성위 촉매액.
원작 설명문은 이랬다.
마력 회복 효율 6배. 단, 마력 회로가 형성되지 않은 자에게는 효과 없음.
마력 회로가 형성되지 않은 자.
나는 병 하나를 들어 램프에 비췄다. 무색투명한 액체가 유리 안쪽에서 느리게 흘렀다.
효과가 없다는 건, 회로에 안 담긴다는 뜻이지.
근데 나는 담을 필요가 없잖아.
통과시키기만 하면 된다.
마개를 뽑았다. 냄새는 없었다.
한 모금.
목구멍이 서늘해지더니, 다음 순간 가슴 한복판에서 뭔가가 터졌다.
"으—"
나는 책상을 붙잡았다.
몸 안으로 들어온 마력이 갈 곳을 못 찾고 헤맸다. 담길 그릇이 없으니 그대로 살가죽 안쪽을 긁고 다녔다. 모래를 혈관에 붓는 것 같았다.
버텨. 흘려보내면 돼.
심장 아래 백지를 떠올렸다.
술식이 거기 그려져 있었다. 설계도가.
나는 그 위로 마력을 밀어 넣었다.
정확히는, 통과시켰다.
손목에서 각도를 꺾고, 세 번째 마디에서 0.3초 멈추고, 손끝에서 얹는다—
팟.
손가락 끝에 불씨가 하나 피었다.
엄지손톱만 한, 초라하고, 흔들리는 불씨였다. 연무장에서 절반이 성공했던 그 1서클 점화.
나는 그걸 삼 초쯤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코에서 피가 떨어졌다.
불씨가 꺼졌다.
책상에 붉은 점이 세 개 찍혔고, 나는 그 위로 엎드려서 한참 숨을 골랐다. 손끝이 감각이 없었다. 팔 안쪽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대가 있음.
확인.
날이 밝을 때까지 나는 계산을 했다.
수첩에 숫자를 적었다.
1서클 점화 1회 = 촉매액 약 1/20병
회로 손상 — 3회 연속 시전 시 기절 추정
회복까지 반나절
병 열두 개. 240회분.
39일 동안 하루 여섯 번이면… 234회.
숫자는 그럴듯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40번을 다 써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건 1서클 점화의 숙련도뿐이다. 회로가 없으니 성장이 누적되지 않는다. 몸이 강해지지도 않는다. 오늘 240번을 쓰든 39일에 나눠 쓰든, 나는 39일 뒤에도 여전히 F등급이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래.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나는 강해질 수 없어.
창밖이 회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39일 뒤 그 자리에서, 나한테 필요한 게 240번인가?
아니다.
숲그늘 아귀가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그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확히 정해져 있다.
한 번.
딱 한 번, 제대로 된 걸 쓰면 된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하나야.
그 한 번에 뭘 베껴 쓸 거냐.
나는 수첩을 넘겨 어제 적어둔 줄을 봤다.
루시아 — 회로 부하 없음. 소모 경로 미확인. 계속 관측할 것.
성위마법.
이 학교에서 그걸 눈앞에서 보여줄 사람은 딱 둘이다. 로자린드 교수, 그리고 1학년 수석.
교수는 연구실에 처박혀 있고, 수석은 매일 연무장에 나온다.
가까이 가야 해.
F등급이 수석한테.
머리가 아파왔다. 코피 때문인지 계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튀어 오르듯 일어나 촉매액 병들을 이불 밑으로 밀어 넣었다. 코를 닦았다. 손등에 피가 묻어났다.
"…누구세요."
"나!"
밝은 목소리였다.
"티아나! 정령학부!"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깐 굳었다.
아침 여섯 시에?
문을 조금 열자, 초록 머리가 틈으로 쑥 들어왔다.
"안녕! 있잖아, 이상한 걸 물어보러 왔는데."
"…또요?"
"응. 이번엔 좀 많이 이상해."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내 얼굴이 아니라 어깨 너머 방 안쪽을 훑고 있었다.
"어젯밤에 얘네가 폐관탑에서 너를 봤대."
— 5화 끝 —